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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마이뉴스 - 니콜라스 세쿤다 <마라톤 BC 490> '올림픽의 꽃'이라 부르는 마라톤 경기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는 무척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한 그리스 병사가 전장에서부터 쉬지 않고 아테네까지 달려가서 승리를 전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2차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육군과 해군을 합쳐서 2만 5천 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군대를 서쪽으로 파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의 목표는 에우보이아, 아테네 두 도시국가라는 것을 밝히고 군대를 보낸 것이다. 페르시아의 함대는 로도스 섬, 사모스 섬, 파로스 섬을 거쳐서 에우보이아에 도착한다. 물론 페르시아 군대는 상륙하는 도시국가를 모두 점령하고 도시와 신전을 불태웠다고 한다. 에우보이아도 마찬가지로 함락되었다. 페르시아군은 에우보이아의 주민들을 노예로 잡고, 도시의 신전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아테네를 점령하기 위해서 페르시아군은 상륙작전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디에 상륙할지가 문제가 된다. 수만의 군사와 말 그리고 보급품을 내릴 수 있는 넓은 평원이 있는 곳, 상륙할 때 저항이 없는 긴 해안선이 있는 곳, 군사와 말이 먹을 수 있는 풍부한 식수가 있는 곳이 바로 상륙작전에 적당한 장소가 된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바로 마라톤 해안이었다. 마라톤 해안은 여러 가지로 상륙작전을 전개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페르시아군의 목적지인 아테네에서 가까운 곳이다. 그리고 긴 해안선과 넓은 평원이 있어서 배에서 짐을 내리고 막사를 설치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평원의 한쪽에 커다란 호수가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페르시아군이 마라톤 해안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곧 아테네에 전해졌다. 아테네는 스파르타로 사절을 보내서 원군을 요청했지만, 스파르타는 몇 가지 이유를 들면서 출정을 연기했다. 아테네는 어쩔 수 없이 자력으로 페르시아에 맞서는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의 장군들은 토론을 시작했다. 성 밖으로 나가서 적을 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성에 틀어박혀서 농성전을 벌일지가 문제였다. 결국 결단력이 있는 장군 '밀티아데스'는 성 밖에서 적과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중무장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아테네 평원으로 달려갔다. 기원전 490년 9월 4일의 일이다. 그리스군 궁수 기병 지원 없이 화살을 뚫고 돌격 전투가 시작된 것은 9월 11일이었다. 그러니까 양군은 약 일주일 동안 아무런 교전 없이 마라톤 평원에서 대치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르시아군은 중앙에 정예보병을 배치하고 그 양 옆으로 좌익과 우익을 세웠다. 이런 진형은 아테네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아테네군은 수적으로 열세이다. 그래서 전선이 좀 엷어지더라도 전선의 길이가 페르시아군과 비슷해지도록 병사들을 길게 늘어세웠다. 그리고 중앙이 아니라 좌우익에 정예부대를 배치하는 전술을 택했다.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 사이의 거리는 약 1.5km 였다. 진형이 모두 갖추어지자 돌격을 시작한 것은 아테네군이었다. 당시 그리스에는 '갑옷 입고 달리기'라는 육상 경기가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군사들은 마치 이 경기를 하는 것처럼 페르시아군을 향해서 돌진했다. 물론 1.5km의 거리를 모두 뛰었던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궁수의 사정거리인 40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아테네 군사들은 빗발치는 화살을 뚫고 돌격해 들어갔다. 마라톤 전투의 시작이었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보병들이 궁수나 기병의 지원도 없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테네 보병은 무장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그들을 지휘하며 달려가는 환영을 보았다고 한다. 전투는 처음부터 혼전이었다. 짧은 시간에 결판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결국 아테네의 장군 밀티아데스의 의도대로 전개되었다. 밀티아데스는 중앙을 포기하는 대신에 좌우익에 정예부대를 배치하는 전술을 택했다.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아테네군은 중앙을 돌파 당했지만, 좌우 양 날개에서 페르시아군을 협공하는데 성공했다. 아테네의 완승이었다. 아테네 측 전사자는 192명, 반면 페르시아 측 전사자는 6400 명이었다고 한다. 바다에서 아테네를 공격하려던 페르시아의 나머지 군사도 모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전령인 에우클레스(혹은 필리피데스)가 완전 무장한 상태로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뛰어갔다. 지금의 마라톤 코스인 42.195km 보다 조금 더 짧은 거리다. 전령은 아테네 정부건물 입구에서 "만세!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라는 말만 남긴 채 숨졌다고 한다. 마라톤 전투는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전투를 역사의 흐름을 바꾼 전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대결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이후에 등장한다. 바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진두지휘했던 3차 페르시아 전쟁과 살라미스 해전이다. 하지만 마라톤 전투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전투이다. 그 의미는 그리스의 중장보병과 그들이 사용했던 밀집대형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 후 2000년 이상 서양의 전쟁에서 사용된 보편적인 전투방식의 효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들과 맞붙어서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라는 점도 의미가 있다.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78년에 끝났다. 페르시아는 패퇴했고, 아테네는 패권국가가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을 결정지은 것은 아테네의 해군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리스 전체가 단결해서 적과 싸운 사례이기도 하다. 마라톤 평원과 마라톤 해안은 지금도 있다. 마라톤 해안이 유명한 관광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테네에서 마라톤으로 가는 직행버스도 많이 있고 마라톤 해변에는 숙박시설도 많이 있다. 마라톤에는 박물관도 있고 고대에 사용했던 감시탑도 있다. 그리고 전승 기념 트로피도 있다. 마라톤 전투가 있었던 9월은, 이곳에서 늦여름인 시기다. 늦여름의 태양 아래서 두세 시간을 걸어다니면 마라톤 전장을 모두 돌아볼 수 있다. 물론 그렇게 걸어다니다 보면 전투를 치렀던 당시 병사들의 피로도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테네에서 출발해서 하루 일정이면 마라톤을 돌아볼 수 있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는 것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마라톤에서 아테네로 오는 버스도 많은데다가, 늦여름에는 오후 8시가 되어야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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